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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7.12.21 조선 그리고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지킨 인물 10
제목이 거창합니다....ㅎㅎ;;
하지만 약간 긴 이 글을 다 읽고나신 뒤에라면 어느정도 제목이 공감이 가지 않을까 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켜낸 인물이 누구냐에 대한 질문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 이라는 답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구한말 당시 한국을 지켜낸 인물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릴만한 분들이 얼마나 되실런지요?
시대적인 상황이 워낙에 어려웠고 일제치하의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등....
수많은 어려운 상황을 짧은 시간에 겪어온지라 딱히 한 인물을 이야기만은 힘들듯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생각에는 딱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



구한말 서울에는 3대 부자집안이 있었습니다....
화신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의 소유주였던 박흥식, 광산을 통해 큰 돈을 번 백 부잣집....
그리고 서울 종로 및 배오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전형필 선생님 집안....



다른 부자들과는 달리 전형필 선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거의 구한말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던
우리나라의 문화재 수집에 쏟아부었습니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뒤 귀국한 그는, 한국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과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분이신 오세창 선생으로부터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안목에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의 문화재가 다른 나라 특히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 성북동에 '보화각'이라는 건물을 짓고는 자신이 수집해온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을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이 보화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의 전신이 된 곳이기도 합니다....



전형필 선생에 얽힌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1.
1936년 11월 22일, 지금의 퇴계로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골동품 경매가 있었다.
백자 명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靑華白磁陽刻辰砂鐵彩蘭菊草蟲文甁, 보물 제241호 --> 현재 국보 제294호)이었다.
아름다운 곡선의 몸매, 희고 보드라운 살결에는 들국화 몇 가지와 푸른 풀잎이 어울려 수를 놓았다.
그 위로 나비들이 꽃으로 날아들고….
풀잎은 청화, 들국화는 진사와 철채로 그린 보기 드문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백자의 최고가가 2천원을 넘지 않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의 경악 속에 호가가 이어졌다.
간송의 대리인으로 일본인 골동상인 溫古堂 주인 심보(新保喜三)가 외쳤다.
"1만원."
일본인 야마나카(山中)가 다시 불렀다.
"1만 5백원."
5백원 단위로 몇 차례 공방이 오갔다. 그리고 심보가 소리쳤다.
"1만4천5백원."
따라 부르던 야마나카의 응수가 길어졌다.
"1만4천5백10원."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심보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1만4천5백80원."
경락봉이 '탕'하고 책상을 울렸다. 이어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 백자 값은 비싸야 2천원, 20칸 기와집 한 채가 2천원일 때였다.


2.
고려청자의 대표작이자 세계적 명작으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국보 제68호)은 개성 근처에서 도굴된 이후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가 대구의 신창재라는 사람이 사들였다.
이때 값이 4000원. 그 후 다시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가 갖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간송은 마에다의 요구에 두말 않고 2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들인다.
일본인 수집가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도 접촉했으나 엄청난 값
때문에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물건이었다.
이를 안 일본 굴지의 수집가 무라카미가 간송을 찾아와 4만원을 불렀다. 간송의 대꾸가 속이 시원하다.
"이 청자보다 더 좋은 물건을 나에게 가져오면 이 매병을 원금에 드리지요."
무라카미는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외유출 위기를 넘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1962년 12월 국보로 지정되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간송은 귀중한 문화재에 값을 매길 수 없다 하여 사들이면서 단 한번 흥정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간송을 이야기하면서 값을 따지기는 송구스런 일이지만(어느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매병의 값은 2백50억원쯤이라고 한다.
일본으로 유출된 것을 간송이 되찾아 온 도자기 명품은 이밖에도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靑磁象嵌柳竹蓮盧鴛鴦文淨甁, 국보 제66호), 청자기린유개향로(靑磁麒麟鈕蓋香爐, 국보 제65호), 청자압형수적(靑磁鴨形水滴, 국보 제74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靑磁象嵌葡萄童子文梅甁, 보물 제286호), 청자상감모자합(靑磁象嵌母子盒, 보물 제349호),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 보물 제238호) 등 국보와 보물이 숱하다.
(참고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미술이나 국사 교과서에 고려청자를 소개할 때 사진으로만 나오던 바로 그 청자입니다....ㅎㅎ;;)


3. 고려청자의 최고 컬렉션으로 이름 높던 영국출신 변호사 존 개스비(John Gadsby)의 수장품을
일괄 인수할 때는 5천석지기 전답 판 돈을 몽땅 쏟아 부었다.
개스비는 영국 귀족으로 도쿄에 와서 국제변호사로 활약하던 중 고려청자에 흠뻑 빠져 수집광이된 사람이다. 그에게 고려청자 명품이 많다는 정보를 갖고 있던 간송은 1937년 2월 일본으로 갔다.
국제정세에 불안을 느낀 개스비가 수장품을 일괄 처분하고 귀국하려 한다는 전갈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송은 급히 공주에 있던 땅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개스비 컬렉션은 양과 질 모두 대단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이 된 것만도 여러 점일 정도다.
청자기린형향로(국보 제65호), 청자압형연적(국보 제74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보물 제286호),
청자상감국목단당초문모자합(보물 제349호) 등이 그것이다.
간송은 청자 10여 점 값으로 10만원을 지불했다. 기와집 50채 값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최형필 선생은 끝까지 문화재 수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194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현해탄을 건너갈 뻔한 위기에 있던....

훈민정음(訓民正音, 국보 제70호)(해례본) 원본을 일본인들에게 그 당시 1만천원을 지불하고 구입하여 보화각에 보관 하게 됩니다....

만약 이 당시 전형필 선생이 이 훈민정음을 구입하지 못했다면....

상상하기도 싫어집니다....ㅜㅡ

귀중한 문화재에는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하여 물건값을 절대 깎지 않았으며, 또한 시세보다 더욱 후하게 지불을 했던 까닭에 고서점 상인들은 귀중한 물건이 나오면 제일 먼저 전형필 선생에게 연락을 했다고도 하지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네, 바로 미국 워싱턴의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입니다....
대략 8,000만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는 곳이지요....
이 도서관의 본관 메인로비 그 넓은 공간에는 딱 두 권의 책이 온갖 보안장치에 둘러싸인 채 전시되어 있습니다....
양피지에 손으로 필사해 놓은 성서 그리고 15세기 독일에서 인쇄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이지요....
위의 두 권의 책들도 나름 의미있는 것들이지만, 우리나라 훈민정음 원본....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뜻으로 만들었는지가 분명한 인류 문화사상 유일의 문자, 한글 창제의 의도와 해설을 밝혀놓은 '훈민정음'의 초판본은 딱 지구상에 한 권 밖에는 없는 세계의 문화유산입니다....



앞서 밝힌 이런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들이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의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간송미술관은 상설 전시회는 없고 1년에 딱 두번, 5월과 10월에 특별전시기간 동안만 전시가 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합니다....



이 글의 초입에서 제가 드린 질문 그리고 이 글의 제목....
이제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가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까짓 문화재 몇 점 자기 돈 주고 산게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라고 하신다면 딱히 드릴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그 당시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돈을 써가며 일종의 의무감 아닌 의무감으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전형필 선생 같은 분이 계셨기에, 우리가 자랑스럽게 우리의 문화재를 세계에 알리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항상 전형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무엇인가?
그리고 현재 한국의 문화재 그리고 문화에 대한 정책과 지원은 어떤 수준인가?




이제, 2008년 5월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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