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Anemone 2010. 7. 22. 22:11

1. 오랜동안 동호회 생활을 해왔고,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지만,

저와 술을 마셔보신 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모임을 주선하더라도 주로 커피 마시는 것을 선호했고,

송년회나 신년회 등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면, 평소에 사람들을 만나서 반주 혹은 호프집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2. 직업 상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년에 집에서 자는 날보다 밖에서 자는 날이 많고,

평지보다는 산, 강, 바다에 있는 시간이 더욱 많은 일을 하다보니,

직업상 만나는 분들이 거의 모두 술을 잘 드시는 분들입니다.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고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다음날 하루종일 해야할 일을 다 하는,

어떻게 보면 정말로 독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대학때부터 야외를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 좋아했지만, 매일매일 저녁 먹으면서 마시는

소주 한잔의 시간이 엄청나게 괴로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도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는 출장에서는 이 점이 참 애로사항 중에 하나입니다.


3. 제가 술을 가장 많이 마셨던 때는 아마도 대학때가 아닐까 합니다.

같이 방을 쓰던 형님이 술을 정말 좋아하셨고, 연구실에서 나오면서 의례 방문했던

솥뚜껑삼겹살집에서 거의 매일 술을 마셨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고기 먹으면서 한두잔 마시던 술이 나중에는 습관이 되다보니 안마시면 은근 무언가 허전하고,

급기야 일년 정도 뒤에는 저 혼자 무려 소주 2병을 비우고도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그런 수준까지 가게 된 것을 보고는 제 스스로 놀랐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참 힘들었던 대학2학년 때, 저를 위로해준다고 술 잘마시는 동기녀석이 술 사준다고 저를 학교 앞

편의점 파라솔로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맥주를 한박스 구입해서는, 파라솔 탁자 밑에 놓아두고 한병씩 한병씩 빼서 마셨는데,

그날 둘이서 말린 오징어와 문어다리 몇 개를 가지고 2박스를 비운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정신 말짱히 집에 들어와 잠을 잤던 기억,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 때도 참 많이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 일 이후로, 선배나 동기 그리고 후배들이 제일 무서워 하는 말이, 제가 술 먹자고 하는 거라고 했었습니다.


4. 그렇게 보면 저도 술을 그렇게 거부하는 몸은 아닌것 같습니다.

선천적으로도, 아버님께서 술을 엄청나게 잘 드셨었고,

친가쪽 분들은 정말정말로 술을 많이 잘 드십니다.

설날이나 추석때 부산에 내려가면, 온 가족들이 식탁 옆에 양주와 맥주, 소주를 박스로 가져다놓고

그걸 다 드시고 입가심한다고 또 어딘가를 나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고모분들께서는 제가 술 못하는 것을 엄청나게 안타까워하시며,

'너도 박씨의 피가 흐르니 언젠가는 노력하면 잘 마실수 있을꺼다~'라고 하시면서

저를 위로(?)해주시곤 했습니다.


5. 술을 못마시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회생활을 유지해나가는데 있어서 적절한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데는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일 이야기를 하면서 서먹서먹하게 밥만 먹는 것 보다는,

소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무리 어려운 계약이나 대화라도 의외로 '술술' 풀려가는 경우가

정말로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귀고 서로간의 대화를 할 때도 술이라는 매개체는 정말 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지금 출장을 나와있는 이 순간에도,

옆방에서는 저를 제외한 다른 분들이 맥주 한잔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술을 즐기는 사람 그리고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정말 부럽습니다.


6. 어떻게 보면 저는 술을 못마시는 것이 아니라 안마시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얼굴이 금방 벌겋게 변해서 사람들은 술이 많이 취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솔직히 얼굴만 그렇게 될 뿐 정신은 말짱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생활 하는데 그렇게 좋은 역할을 해주게된다면,

사람과 통하는데 좋은 윤활유가 되어준다면,

그 이외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면 너도 마시면 되지 않냐고 묻는 분도 많으실겁니다.

더군다나 못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안 마시는 것이라면 더더욱.


7. 하지만,

왠지 술이란 친구는 저와는 지금보다 더욱 더 가까워지기에는 힘든, 그런 친구인 것 같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적정선을 넘어 더욱 친해지면 좋은 친구가 있고,

어느정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야 더욱 편하고 돈독해지는,

술이란 녀석은 저에게는 후자의 경우가 맞나봅니다.


8. 이 글을 작성하면서 저는 지금 시원한 맥주 한 캔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순간,

이녀석은 저에겐 참 소중한 친구입니다.

: )